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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다른 생명의 현상처럼… 똑같은 흰색은 없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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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염살현 작성일21-11-07 03:48 조회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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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항상, 곁에, 있는 단색이동엽평생을 하얀 우주를 구현하는 데 몰입선도, 형상도 없는 흰 캔버스 위에희미한 붓자국으로 물질성 배제하며출렁이던 마음에 평안함 불어넣어서승원실험미술의 선두에서 주요한 활약형태, 색채, 공간의 동시성 탐구백자·창호지 등 한국적 소재로절제되고 온화하게 어우러진 ‘면’의 향연#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이번 가을 가장 인기가 높은 전시를 꼽자면 단연 박서보 개인전일 것이다. 미술계에서 그의 입지는 워낙 탄탄했지만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은 대중성도 가지게 한 것 같다. 미술과 관련 없는 업계 종사자들도 전시를 기다리다 관람했다는 연락이 꽤 왔다. 관람 이후 진지하게 작가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다며 책과 강의 추천을 원하기도 했다. 이 연락을 받고 간략하게 작가와 그가 속한 단색화 움직임을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빼먹을 수 없는 전시가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였다.‘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는 단색화의 시발(始發)로 여겨진다.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이 한국에서 반한 다섯 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 전시다. 이 전시는 형상 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을 통해 새로운 미술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냈다. 다른 나라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백색과 그 안의 정신성을 담아낸 작품들을 제작해 선보였다. 당시 아사히신문이 올해 가장 주목할 전시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한국 다섯 명의 작가’로 불린 작가들은 박서보를 포함해 권영우, 이동엽, 서승원, 허황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2010년대 중반 단색화의 급부상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한다. 일부는 세상을 떠나 작품을 직접 선보이며 설명할 기회가 없어 아쉽게 되었다. 모두의 상황은 다르지만 그들의 작품은 항상 우리의 곁에서 머물며 감동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이동엽의 깊고 하얀 우주이동엽(1946~2013)은 194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국 전쟁을 경험했고 전후 도시 복원과 함께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은 점점 더 빛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느 날은 길에서 흑백으로 옷을 입은 한 여인을 봤다. 이어서 ‘색채 중에 흑백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며 작업으로 이어져 캔버스 위에 실현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미술비평가 윤진섭이 말했듯 “평생 오로지 흰색과 회색을 부여안고” 살았다.이동엽은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이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참여해 하얀 바탕에 반투명 컵을 그려 데뷔했다. 이 전시는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할 국내 작가 선정 공모전이라는 부제를 가졌다. 입체와 평면으로 나누어 등수를 매겼는데 이동엽은 평면 부문 1등을 차지했다. 전국적 규모의 공모전이었기에 전시에는 국내외 주요 미술계 인사들이 방문해 작품을 봤다. 이우환은 일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함께 감상했는데 두 사람은 이동엽의 작품에 감탄했다.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 기획에 이동엽을 포함했는데 이 전시가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였다.이동엽의 대표 작품으로는 ‘상황’ 연작과 ‘사이’ 연작이 있다.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에서 선보였던 작업은 ‘상황’이다. 이 작품은 순백의 화면 위에 회색빛이 도는 갈색으로 컵과 얼음의 테두리만 은근하고 천천히 그린 것이다. 컵 안에 담긴 얼음이 녹는 과정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해 인상적이다. 그는 어떤 것을 담아도 보이는 컵의 투명성에 주목하여 그것을 우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얼음이 녹고, 증발하고, 비워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투명한 컵과 얼음은 사람을 포함하는 존재의 가변성과 무상성을 드러낸다.이동엽은 존재의 가변성과 무상성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다음의 말을 남겼다.“똑같은 순간은 없어요, 똑같은 순간이 없기 때문에 매번 색이 달라요. 다 같은 흰색같이 보이지만 매번 우리가 매번 호흡이 다르듯이 또 매번 생명의 현상이 다르잖아요.”이렇게 가변성을 다루며 ‘상황’에서보다 색에 집중한 작업이 ‘사이’ 연작이다. ‘사이’의 흰색 캔버스 위에는 어떠한 선도, 형상도 그려져 있지 않다. 다만 넓은 평필의 한 면에는 흰색, 다른 한 면에는 회색을 묻히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움직인 희미한 붓 자국만 있다. 물질성을 배제하고자 한 이러한 시도는 결국 정신성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출렁이던 마음에 평정심이 찾아온다.이동엽은 제6회 카뉴 국제회화제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3인 공동 국가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 미술대상전, 중앙미술제에서도 잇달아 수상했다. 하지만 그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작업을 이어가며 전시가 뜸해졌다. 2000년대 들어서며 오로지 작품만을 본 이들의 초청으로 전시 활동을 재개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붓이 만들어 낸 하얀 우주는 호평을 끌어냈다. 깊고 깊은 우주를 우리에게 선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세상을 떠났다.서승원, ‘동시성-무한계’의 PKM 갤러리 전시 장면.PKM 갤러리 제공#서승원의 침정(沈靜)한 동시성서승원(1941~)은 한국 실험 미술의 선두에 섰던 작가다.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에 다니며 권영우 등과 함께 당시 지배적 추상 양식인 앵포르멜에 반발해 오리진 그룹을 조직했다. 이후 앵포르멜 대안으로서의 작품을 제시하는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했다. 그는 이처럼 전쟁 이후 새롭게 형성하는 한국 미술에서 활약하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에 참여했으며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미술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파리 청년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등의 주요 미술 행사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이렇게 새로운 조형성을 지향한 그가 오랜 시간 탐구해온 것은 동시성이다. 형태, 색채, 그리고 공간이 하나의 평면 위, 동시에 존재하는 일이다. 이 주제는 대학 시절 선보인 작업부터 아주 최근의 작품까지의 다양한 변주 속에서도 한결같다. 수십 년을 이어온 사고(思考)는 부름켜와 같고 작품은 굵게 자라난 나무와 같다. 즉, 뿌리 뽑히지 않는 깊고 넓은 나무다. 작가는 스스로 매개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의 붓질을 통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함께 드러나는 세상을 화면에 만든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동일하고 균등한 시공간 속에서 발현시킨다.작가가 동시성 작업을 이어오도록 영감을 주는 것은 한국적 소재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던 그는 한국적인 사물과 장면을 만날 때 마음에 울림을 느낀다. 집에 조심스레 놓여 있던 소박한 백자 항아리, 햇볕을 투과해 은근한 빛으로 드러내는 창호지, 단청에 고이 올라간 오방색 물감, 자유로운 배치 구도와 화려한 색채로 가득한 책가도 등이다. 그는 이 소재들에서 보는 색과 형태, 비어있음과 거기서 오는 정서를 끊임없이 걸러낸다. 작가의 어머니가 한옥 한쪽에서 다듬이로 수없이 빨래를 두드려 걸러낸 흰색을 보여주셨듯 말이다. 이 과정에서 경계는 허물어지고 정수인 감각만이 남아 작품에 드러나게 된다.60년대의 ‘동시성’은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모습을 보였다. 직선으로 구성한 화면에 오방색을 칠한 환원적 그림이다. 4·19혁명 이후 새로움에 목말랐던 작가가 시도한 기하학적 추상은 전에 없이 생소하고 어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자기 작업을 굽히지 않고 이어가고 발전시켰다. 2000년대부터는 직선이 만든 뾰족한 모서리가 사라졌고 채도가 낮아져 따뜻하고 은은한 색이 화면을 메우기 시작했다. 절제를 통해 온화해진 그의 화면에는 그 어떤 것도 부딪히지 않고 중첩되고 어울리며 함께 존재한다. 언젠가의 개인전처럼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를 통해 실현한 동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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